공(公)의 휘(諱)는 계중(繼重)으로 서기1481년(성종12년) 12월 15일 출생 본관(本官)은 곡성(谷城)이고 자(子)는 자술(子述)이며 호(號)는 만절당(晩節堂) 이다. 공은 곡성임씨(谷城任氏) 시조 휘(諱) 천록(天祿)의 8세손으로 좌우위중량장(左右衛中郞將)을 지낸 휘(諱) 복룡(伏龍)의 증손(曾孫)이며 휘(諱) 간보(幹甫)의 손(孫)이고 교수(敎授) 휘(諱) 효원(孝源)의 자(子)이다. 공은 1507년(중종2년) 사마시에 등과하여 1508년 (중종3년) 임금 앞에서 대학(大學)을 강론하고 진언(進言)하기를 효도란 것은 어버이를 섬김으로써 임금에게도 충성을 할 수 있는 것이니 반드시 3년 상을 행하여야 한다고 주청하니 임금도 계중이 진언한 말이 매우 옳으니 아름답게 여겨 빈청(賓廳)에 명하여 술을 내려 주었다. 공은 1514년(중종9년) 명경별시(明經別試)에 조충손(趙忠孫)과 함께 병과에 급제하였고 그해 12월 김안국 ,홍언필등과 함께 28인의 사유(師儒:도를 가르치는 유학자)에 뽑혔다. 1519년(중종14년)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제현(諸賢)들이 피화(被禍)되자 연천에 내려와 임장서원(臨障書院)의 모태가 되는 서원을 세워 당대의 유학자인 김안국 김정국 및 향내(鄕內)유림(儒林)들과 함께 주자학의 정신을 탐구 하였다. 기묘사화 이후 봉상시에 입참(入參)하였고 숭문원(崇文院)박사 병조와 호조 좌랑(佐郞) 홍문관 교리, 양양군수를 거쳐 1530년 고양군수를 비롯하여 연안부사, 풍천부사를 지냈다. 1535년(중종30년)에 다시 사유(師儒) 13인 에 선정되었다. 이후 1542년(중종37년) 성균관 사성(司成)으로 재직, 1544년 향년 64세로 타계하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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